류방택의 생애와 사상

   류방택의 일생에 대해서는 고려 말의 대표적 학자인 정이오(鄭以吾 1347~1434)가 그의 일생을 요약해 써놓은 것이 정이오의 문집 ‘교은집(郊隱集)’에 남아 있다.  이 ‘류방택 행장(行狀)’은 1411년에 쓴 글인 것으로 보아 류방택이 죽은 9년 뒤, 아마 그의 비석을 세우며 후손들이 그에게 부탁해 쓰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직 밝혀내지 못했지만, 정이오는 연배로 보아 류방택의 아들 유백유(柳伯濡)의 친구 쯤 되는 것으로 보인다.  유백유는 공민왕(1369) 18년 장원급제 했고, 정이오는 5년 뒤인 1374년에 과거에 급제했다.

  하지만 류방택이 이 천문도에 이름을 새겨 남기게 된 것은 꼭 자신이 원했던 일은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는 분명히 이성계의 권력 찬탈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가 고려 멸망과 함게 숨어버렸다는 등의 전해지는 야사(野史)는 그만두더라도, 류방택이 고려에 충성한 조선왕조의 반골(反骨)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정이오가 쓴 그의 행장에 뚜렷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류방택은 그가 천문 계산에 이룩한 공로를 인정하여 태조 이성계가 그에게 개국일등공신을 주려 했으나, 이를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개성(松都)의 취령산(鷲嶺山) 아래 김포방(김포방)에 순었다고 정이오는 기록하고 있다. 
그 때 류방택의 나이는 73세였으니, 거기 집을 짓고 그 위에 단을 만들어 날마다 옛 서울을 향하고 눈물 흘리고 그 쪽을 쳐다보고 절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시를 지었는데, 그가 남긴 몇 편 안되는 시 가운데 들어 있다. 
정이오는 그의 행장에서 그 가운데 두 줄만을 인용하고 있는데, 徠松酷受霜前幹하고 淇竹偏憐雪後枝라는 대목이다.  중국의 소나무와 대나무가 많은 산과 물의 예를 들어 자신의 송죽(松竹)같은 절개를 노래한 것이다.

  ‘고려에 향한 그의 정절(貞節)이 이 정도로 극진했다’고 정이오는 쓰고 있다.  그는 죽는 날 두 아들게게 ‘나는 고려 사람으로 개성에서 죽으니, 내 무덤을 봉(封)하지 말고, 미석도 세우지 말라고 했다’고 이 기록은 전한다.  그의 시 끝은 ‘평생 전조(前朝)를 잊지 못하고 사모하며, 거문고 뜯어 내 마음을 부쳐보노라!(平生耿耿前朝意 彈一雅絃奇所思)’로 끝난다.

  그가 극진히 여겨 만들고 가꾸었던 공주(公州) 동학사(東學寺)의 삼은각(三隱閣)은 그런 그의 마음을 후세에 전한다.  이는 고려 충신으로 은(隱)자를 호를 가진 세 명을 모신 사당이다.  너무나 유명한 이들 삼은(三隱)이란 바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를 뜻하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류방택은 조선왕조가 시작되자 고향 서산으로 내려와 살면서 공주의 절에 이들 중 두 고려 충신(圃隱과 牧隱)의 사당을 지어 그들의 충성을 기렸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하여 류방택이 새 왕조에 대해 적극적인 저항을 한 것은 아니었다.  태조 이성계의 명을 따라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만드는 데 천문계산을 책임지어 지도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는 예조판서 손애(孫埃)의 큰 딸과 결혼, 3남 2녀를 두었다.  아들 셋(伯濡,  伯淙, 伯淳) 가운데 첫 아들 유백유(柳伯濡)는 이색의 제자로서 공민왕 18(1369)년 장원급제한 후 계속 함께 목은 이색을 지지하여 급격한 전제 개혁에는 반대했다. 
이들 형제의 이야기는 정이오의 류방택 행장에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고려사’에도 뚜렷하게 기록되고 있다.  이 전제의 개혁은 당시 가장 큰 사회경제 혁명의 표현으로 바로 이성계, 정도전, 조준 등이 추진한 것이었고, 그에 반대했기 때문에 이들 형제는 광주(光州)로 유배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왕조가 시작된 다음에는 계속해 새 왕조에 출사하여 유백유는 태종 때에는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가 되기도 한다. 
그는 자신은 고려의 충신으로 남고 싶었으나, 자손들의 살아가는 길을 막을 생각은 없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류방택은 집안에 별채를 지어 거기 ‘금헌’(琴軒)이란 이름을 붙였다.  금헌이 그의 호가 되는 셈인데 아마 말년의 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금(琴)은 거문고를 가리키는데, 금(禁)과 같은 발음을 고른 것으로, 사특한 마음을 금한다는 뜻이다.  그는 또 거문고를 직접 연주하고, 음악을 사랑했던 것이 분명하다.  배우는 사람은 마땅히 음악을 통해 마음의 찌꺼기를 걸러내고 순수한 마음을 길러야만 공부하는 바탕을 마련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오늘날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잘 알려져 있으면서도, 그 천문 계산을 맡았던 고려 말의 위대한 천문학자 류방택이 전혀 알려지지 않게 된 사연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우선 이 돌에 새겨진 천문도의 중요성조차 세상에 알려져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불과 30년도 되지 않는다. 
그것이 ‘국보’로 지정된 것은 1983년의 일이고, 그 전까지는 창덕궁(당시 비원으로 널리 알려짐) 창고 속에 보관은 되었지만, 세상에는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었다. 
이 중요한 우리 과학 문화재가 천문학자와 과학사 학자들의 연구 대상으로 부각된 것은 그 후의 일이다. 
그와 함께 그것을 만든 사람들에 대해서도 조금씩 관심을 생겼지만, 아직 그 이름 가운데 이미 문필가이며 학자로 유명한 권근만이 약간 거론되었을 뿐, 그 진짜 주인공 류방택은 무시될 수밖에 없었다. 
류방택이란 이름은 천문도의 둘째 자리에 등장하지만, 그 인물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과학사 연구 수준이 높아가면서 차츰 이런 숨은 사실을 발굴하여 우리 과학사의 지평을 넓힐 수 있게 된 것은 늦게나마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이런 발굴이 천문학사 이외에도 여러 분야에서 더 활발해 지기를 바랄 따름이다.  또 눈을 돌리면 그런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